역사

이탈리아의 역사-제 1차 세계대전

지게꾼2 2024. 8. 13. 16:48

이탈리아는 1915년에 국민 통합을 위해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역사적 관섬에서 보면 제 4차 이탈리아 독립전장으로 보기도 하고 있다. 

 

 

이 전쟁으로 독일 및 오스트리아의 동맹을 유지할 것인지 결정해야했다. 6개월 동안 이탈리아는 중립을 지켰는데 삼중동뱅이 방어적인 목적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1915년 이탈리아는 중립을 선호하는 대중과 엘리트들의 분위기에도 전쟁에 참여한다. 그고 가난한 나라로 정치 시스템이 혼란스러웠고 재정도 좋지 않아 군대가 준비되어있지 않았다. 삼중동맹은 이탈리아에게나 큰 의미가 없었다. 안토니오 살란드라 총리와 시드니 소니노 외무장관은 비밀리에 협상을 했다. 알바니아를 보호국으로 만들며 티롤과 트리에스테를 포함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넓은 영토를 약속했다. 러시아는 이탈리아에게 달마티아를 주는 것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영국은 오스트리아의 남쪽을 위협하는 새로운 동맥국으로 약 3천 6백만명의 이탈리아인들 확보하기 위해 보조금과 대출을 지불했다. 

 

1915년 5월 런던 조약이 발표되고 반전 요소들로 소란스러웠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전쟁을 두려워했다. 전쟁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거리에 모여들기도 했다. 전쟁에 대한 열정은 정치에 대한 극심한 적대 반응에서 나왔고, 지배층의 실패, 좌절, 무능을 보여주는것이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사호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이 전쟁을 지지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신문을 만들었다. 이탈리아 전쟁에 끌어들이기를 열망한 연합국들이 신문의 재정을 도왔다. 전쟁이 끝이 난 이후, 이 신문은 파시스트 운동의 공식 식문이 된다. 

 

이탈리아는 약 87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참전했지만 1911-12년 튀르키에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보급품이 고갈되가고 있었다. 군대의 지휘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중포와 기관총이 턱없이 부족했다. 오스트리아군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1916년 독일전쟁을 선포했다.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연합군의 대규모 자금 지원이 필요했지만 약 65만명의 이탈리아 군인이 사망하고 약 95만명이 부상을 입었다. 

 

전쟁 전까지 정부는 노동문제를 무시했지만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보충하기 위해 개입에 나섰다. 주요 노동자 계층의 사회당은 전쟁을 반대했고, 특히 사회당의 거점인 피에몬테와 롬바르디아에서는 파업이 일어나 제대로 협력되지 못했다. 정부는 높은 임금과 단체 협상 및 보험제도를 부과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기업이 성장했는데 인플레이션은 생활비를 두배로 올려놓았다. 산업 임금은 보조를 맞췄지만, 농장 노동자의 임금은 그대로였다. 시골 지역에서 산업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고 임금 인상도 제대로 되지 않아 불만이 높았다. 

 

이탈리아 전선의 전쟁이 종료 되었음을 알리는 볼레티노 델라 비토리아와 볼레티노 델라 비토리아 나발레가 발표했다. 이탈리아 승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로 인해 가능했고, 2주도 되지 않아 제 1차 세계 대전을 끝내는것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약 65만명 이상의 이탈리아 군인들이 사망했다. 영양실조, 식량부족으로 민간인 사망은 약 58만명으로 추정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항복이후 1918년 11월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영토인 트렌티노 알토, 율리안 행진, 이스트리아, 크바르너 만 및 달마티아를 점령했다. 달마티아 해안에서 라팔로 조약을 맺으며 이탈리아-유고슬라프 협정에 따르 달마티아 주를 대피시켰다. 

 

전쟁이 끝난 후, 이탈리아ㅢ 비토리오 에마뉘엘 올란도 총리는 베르사유에서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 만나 미래의 유럽전쟁을 피하기 위해 어떻게 유럽의 국경을 정립할 것인지 논의했다. 그 회담은 윌슨이 모든 유럽 국가들에게 국민 국가를 형성할 자유를 약속했기 때문에 이탈리아에게 거의 영토적인 이익을 주지 못했다. 그 결과,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달마티아와 알바니아는 이탈리아에게 할당되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해외 식민지를 그들의 권한으로 나누기로 결정했지만 이탈리아에게 할당되는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란도는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 생제르맹-앙-레이 조약과 라팔로 조약은 달마티아 도시 뿐만 아니라 트렌티노 알토-아지, 줄리안 행진, 이스트리아, 크바너 합병을 허용했다. 

 

평화 정책에 반발한 이탈리아 민족주의 가브리엘 단누지오는 1919년 9월 불만을 품은 참전 용사와 민족주의자들을 이끌고 자유국가를 만들었다.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가 대단했는데 그는 피움에 대한 공격에 검은 티셔츠를 입은 준군사 조직을 사용했다. 듀스와 검은 셔츠 준 군사 조직의 유니폼은 나중에 베니토 무솔리니 파시스트 운동에 의해 채택된다. 이탈리아의 피움 합병에 대한 요구는 정치계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로마 조약으로 인해 이품은 이탈리아에 합병된다. 이탈리아의 부족한 영토 획득으로 인해 결과는 실패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실패의수사학은 무솔리니에 의해 채택되었으며 이탈리아 파시즘 부장으로 이어졌고, 파시즘 이탈리아의 선전인 핵심이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이 실패를 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파시스트들이 이탈리아 제국주의를 부추기고 자유주의 이탈리아의 성공을 모호하게 만들기 위한 정치적 신화로 간주했다. 이탈리아는 국제 연맹의 집행 위원회에세 영국적인 자리를 얻었다.